<백치 아다다> 백치 아다다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물질이 아닌 사랑에 있다는 주제를 다룬다. 주인공 아다다를 벙어리로 설정한 것에 이어 백치라는
설정까지 덧붙였는데, 이는 아다다가 물질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성의 상징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아다다와 도망친 수룡은 돈으로 행복을
사려는 사람으로, 아다다가 돈을 버려 꿈이 좌절되자 아다다를 죽이는 물질에 오염된 현대인을 상징한다.
<붉은 산> 민족의식을 자연주의적 경향으로 쓴 것으로, 일제 침략기에 수난받는 민족과 조국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잘 나타난 역작이다. 내용은 만주
에 이민해 가 있는 동포들의 촌락을 중심으로 '삵'이라는 주인공이 희생을 무릅쓰고 동포를 위해 투쟁한 영웅적인 행동을 그렸다.
<소낙비> 농촌의 무능력한 남정네와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밖에 없는 부녀자가 살아 남기위해 하지 말아야할 행동까지 하면서도 그 남편과 경성으
로 상경할 날을 꿈꾸며 조각난 삶을 이어나간다.
<물레방아> 초기의 낭만적 경향에서 자연주의 경향으로 전환한 작품으로 나도향의 대표작이며 <뽕>과 같이 하층계급의 방종한 여성의 생활과 비극
을 그린 작품이다.
<금수회의록> 동물들이 토론을 하며 인류를 비판하는 토론체 우화 소설이다. 일제가 1909년 최초로 금서로 지정했다. 이야기꾼(서술자)은 고전소
설의 서사양식인 몽유록 양식으로써 즉, 꿈속에서 이야기꾼이 활동하는 이야기를 가상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나"는 꿈속에서 금수회의소라는 곳에
가게 된다. 그곳에 많은 동물들이 인간의 온갖 악행에 대해 신랄하게 조롱하고 비판한다.
<계용묵> 소설가, 시인, 수필가, 언론 기자, 작가, 기업가이다. 정치나 이념을 자제하고 또한 계몽적이지 않은 순수 문학을 지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교적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묘사가 정교하여 단편 소설에서는 압축된 정교미를 잘 보여주었다.
<김동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
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국최초의 순문예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같은 해 창간된 순문학과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이광수의 계몽주의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고 한국어에
서 본래 발달하지 않았던 3인칭 대명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김유정>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 증리에서 출생, 고향에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1년 7개월을 머무르면서 김유정은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
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하고,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짓고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여는 등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였
다. 1932년 6월 15일에 김유정은 자신의 첫 작품인 「심청」을 탈고하였다(이 작품은 4년 뒤인 1936년 조선중앙일보사 발간 『중앙』지에 발표되었다).
등단한 해에 김유정은 자신의 생에 대표작이라 불릴 작품 대부분을 발표하였다. 「금 따는 콩밭」 · 「금」 · 「떡」 · 「만무방」 · 「산골」 · 「솟」 · 「봄봄」 · 「안해」 등의 단편 10편과 수필 3편이 그가 등단한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는데, 춘천에서 보고 느꼈던 고향의 정취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서 체험한 감상 등이 그의 소설의 주요 모티프였다.
<나도향> (1902년 3월 30일 ~ 1926년 8월 26일) 본명은 나경손(羅慶孫)이며 필명은 나빈(羅彬)이다. 호는 도향(稻香)이다. 습작기의 서툰 창작 형태를 벗어나 이후의 작품은 빈곤, 사회적 계급 관계 등 현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낭만주의적인 감상성, 미학주의와 현실 비판의 냉정한 관찰력이 결합된다. 그의 소설은 인간의 욕망, 토속성과 원시적 건강성,생명력등이 내면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적인과 또 다르게 암시하는 욕망의 실패와 좌절은 사회적 관계의 부조리가 원인이 된 것, 즉 낭만적 이상이 지닌 건강성은 현실의 타락한 관계, 환경에 의해서 일그러지고 왜곡된다.
<안국선> (1878년 12월 5일 ~ 1926년 7월 8일) 구한말의 작가이자 일제 강점기 초기 시대 관료이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에서 졸업했다. 1899년 박영효와 관련된 역모 사건으로 미결수로 구금되었다가 종신 유형을 언도받았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대한 학회 등 여러 사회단체에 참여했다. 1908년 탁지부 서기관으로 임명되었고 '금수회의록'을 발간하였다.